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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경험하기는 조건적이 아니다

기꺼이 경험하기를 제한하는 효과적인 방법과 비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먼저 비효과적인 방법에 대해 명확히 해보자. 기꺼이 경험하기를 배우는 것은 무언가에서 뛰어내리기를 배우는 것과 같다. 뛰어내리기는 다음의 속성을 지닌다. 당신은 당신의 몸을 공간에 던지고,몸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중력에 맡긴다. 당신은 종이 위에서 뛰어내릴 수 있고, 두꺼운 책, 의자, 지붕 또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다. 상황이 다를 뿐, 행동은 똑같다. 그러므로 당신이 종이 위에서 뛰어내릴 때도 뛰어내리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며, 책, 의자, 지붕 또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기 위해서 도 같은 행동이 필요할 것이다.

“뛰어내리기를 배우고 싶어. 하지만 너무 무서워서 한 발씩 걸어 내릴래. 나는 그런 식으로 매순간을 조절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치에 닿는 말인 듯 보이지만,실은 그렇지가 않다、왜냐하면 그러한 방식은 몇몇 상황을 제외하고는 일반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종이, 책,심지어 의자 위에서는 한 발씩 걸어 내려올 수 있지만,지붕이나 비행기에서는 걸어내려올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이 종이 한 장 위에서 걸어 내려올 때, 당신은 뛰어내리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며,필요할 때마다 늘 적용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내담자들과 이 개념을 논의하다 보면,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삶에서 그와 같은 요소들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한 암벽 등반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암벽을 오를 때 몸을 이동하는 것과 같네요. 만일 내가 어중간하게 이동하면 암벽에서 떨어져서 밧줄에 매달려 있게 될 것입니다. 이동하려면 확실히 이동해야 합니 다.” 한 피겨스케이트 선수는 간단한 점프라도 대충하면 실수를 해서 넘어지게 된다고 하였다. 그녀는 간단한 점프든 어려운 점프든 같은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온전히 주의를 기울인 온전한 점프 말이다.

이제 당신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자. ‘열의 없는 적당한 땜질’ 이 통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가? 예를 한두가지 적어 보라. 이제 기꺼이 경험하기가 당신이 방금 적은 것과 같은 것일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는 기꺼이 경험하기가 제한될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상황과 시간을 선택함으로써 그것을 제한할 수 있다. 당신 은 불안한 채로 기꺼이 편의점에 들어가지만 쇼핑몰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과거에 대해 오빠에게 기꺼이 말하지만,어머니에게는 말하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 쇼핑몰에 20분이 아니라 10분 동안 기꺼이 들어가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적절한 조건을 설정하고 기꺼이 경험하는 것과 기꺼이 경험하려 하지 않는 것 간의 차이를 인식하는 방법이다. 고통스러운 사적 경험의 정도나 질에 따라서 기꺼이 경험하기를 제한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고통이 심하지 않으면 기꺼이 경험하겠다.’ 라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근본적으로 ‘기꺼이 경험하지 않겠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얼마만큼의 고통을 허용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뛰어내리기보 다는 한 발씩 걸어내리기에 더 가깝다. 그러나 ‘앞으로 5분 동안 기꺼이 경험하겠다.’라는 것은 안전하다. 당신은 어떤 한계를 설정하지만,그 한계는 경험의 정도나 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지속 시간과 상황에 대한 것이다.





출처: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 Steven C. Ha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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