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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으로서의 기꺼이 경험하기는 기꺼이 경험하기가 아니다

이는 마음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개념이다. 마음에 따르면,고통의 내용은 괴로움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나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그 나쁜 고통의 양으로 괴로움을 측정할 수 있다. 불안과 싸우는 사람에게 ‘좋은 날’은 불안이 더 적은 날이다. 우울과 싸우는 사람에게 ‘좋은 날’은 우울이 더 적은 날이다. 기꺼이 경험하기는 그러한 측정을 버리는 것이다. 괴로움은 더 이상 고통의 내용과 동의어가 아니다. 이제 괴로움은 싸움에서 이기려고 삶을 미루는 것과 동의어다.

기꺼이 경험하겠는가의 질문에 진실로 예라고 대답할 때, 이 모든 게임은 전혀 새로운 게임이 된다. 그리고 “얼마나 불안한가?” 또는 “얼마나 우울한가?”와 같은 예전의 측정치들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마치 경기마다 패배를 거듭한 한 축구선수가 갑자기 축구장 한가운데 벌떡 주저앉아 여전히 축구복을 입은 채로 축구를 하는 대신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몇 대 몇 이야?” 또는 “우리가 이기고 있니?”와 같은 질문들은 더 이상 아 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기꺼이 경험하기는 당신의 의제가 고통의 내용에서 삶의 내용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자기 조작의 방편으로서의 기꺼이 경험하기는 기꺼이 경험하기가 전혀 아니다. 마음은 이를 결코 배울 수 없으나, 다행히도 사람은 배울 수 있다.


수년간 공황장애와 투쟁하다가 ACT를 통해 삶이 변화된 어느 내담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는 예전처럼 투쟁에 갇히게 되는 상황에 처할 때,이제는 거의 투쟁을 선택하지 않는다. 예전에 나는 늘 투쟁하였고, 이제는 투쟁이 효과가 없음을 안다. 투쟁하거나 도망치곤 했던 상황에 처하면,나는 여전히 투쟁의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그저 더 영적인 수준으로 돌아가서,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그것과 더불어 살아간다. 의제 자체가 실제로 바뀌었다. 예전의 의제는 불안에 대한 것이었다. 이제 새로운 의제는 투쟁에 대한 것이며, 심지어는 투쟁과의 투쟁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이를 단지 공포증에 대한 한 가지 치료 접근으로만 보지 않는다. 나는 이를 하나의 철학이나 삶의 방식 이상으로 본다. 그것은 마치 내가 색채를 부여받게 된 것과 같다. 나는 인생 내내 검정과 흰색만을 보고 있었고,이제는 무지개색을 본다. 내가 품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기꺼이 품으려고 하지 않았던 무수한 감정들…….

나는 이제 그 감정들로부터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슬픔이 그러했고, 당황스러움이 그러했고, 불안이 그러했다. 그리고 불안은 지금도 여전히 내가 가장 초점을 두게 되는 감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로 삶을 위협하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자주 접촉한다. 찌르는 듯한 가슴 통증과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낄 때,주의가 온통 거기에 사로 잡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제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즐긴다. 슬픔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슬픔은 늘 끔찍한 것이었다. 슬픔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 자체가 삶을 위협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슬픔이 너무 커서 이를 온전히 느끼려고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슬픔 가운데 머물러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빛이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세계를 접한다. 같은 사물이 불과 몇 달 전에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보인다. 경이로움이 결코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 인생은 광장공포증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사람들,나 자신 그리고 이해에 대한 것이다.




출처: 마음에서 빠져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라, Steven C. Ha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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